의성군 봉양면(鳳陽面) 중심인도리원(桃李院)에서 의성읍 방향 동북쪽으로 불과 2Km 떨어진 곳 5번 국도변에 그모습이 매우 예스런 전통 반촌이있다. 바로 아주신씨(鵝州申氏) 집성촌인 구미리(龜尾里)이다. 1612년에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 1562-1624) 공이 택리(擇里)한 이 마을에는 지금도 고색창연한 와가(瓦家)와 누정(樓亭)들이 즐비할 뿐더러 도와(陶窩) 신정주(申鼎周. 1764-1827)가 그 터의 내력에 대해 기술해 놓은 동지격(洞志格)의 구장지(龜莊志)도 전해온다.
아주신씨(鵝洲申氏)는 경상남도거제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거제도 아주현(鵝洲縣)의 토호 신영미(申英美)이다.
이 마을을 개기(開基)한 오봉공은 27세에 문과 급제 후 예안현감을 지냈다. 임란 때에는 안동현감을 겸임하면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다. 전주판관9全州判官) 때에는 그 지역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우는 등 선정을하였는데, 특히 의성에서 벼슬 살 때에는 봉양면에 장대서원(藏待書院)을 건립하여 고을 자제들의 교육에도 큰 힘을 썼다. 뒷날 승지(承旨)를 역임하기도 했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아들신홍망(申弘望)의 자 망구(望久), 호는 고송(孤松)인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풍의가준정하고 학문이 뛰어났으며 인조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과주서(注書)를 역임했고 유집이 있다. 손자 삼지당(三知堂 신한걸(漢傑)은 주부(主簿), 신한로(申漢老)는 음직(蔭職)으로 선교랑(宣敎郞)을하였으며 현손 신진구(申震龜)는 영조(英祖) 무신년에 창의(倡義)하고 영남소두로 활약한 바 있었으며, 저서로는 군서휘람(群書彙覽)과 유고를 남겼다
그러므로 신오봉 부자(父子)는 조선 중기 의성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학행(學行)과 명망이 있어 조정이나 향촌에서 사림(士林)의 모범이었다. 이 마을 출신으로 상게 인물 외에도 신체인(申體仁), 신희대(申熙大) 등이 유명하였는데, 지금껏 남아 전하는 문화재들로는 오봉종택과 사당(祠堂), 신홍망이 서당(書堂)으로 지은 낙선당(樂善堂), 신체인이후학 양성을 위해 지은 금연정사(錦淵精舍)를 바꾸어 지은금산서원(錦山書院), 신한걸의 강학지소(講學之所)였던 삼지당(三知堂)과 신희대의 유덕을 기려 1981년 후손들이 세운 정자 창암정(蒼巖亭),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장대리(藏待里)에 1702년(숙종 28) 오봉공이 경현사(景賢祠)를 서원으로 추숭하여 장대서원(藏待書院)을 짓고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 회당(悔堂) 신원록(申元祿) 선생을함께 모셨다. 1868년 8월에 조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으며 1996년에 중건하였다.